의식의 각성

[스크랩] 호흡 (51) 인연

코스모칸 2011. 2. 7. 12:16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호흡이라는 단순해 보이는 명제로 100회라는 제법 많은 회를 작정하며 연재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가장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한 사람은 placebo님 이었지만 어쩌면 pla님은 나에게 이 작업을 하게 만든 자신도 모르는 채널러일 것이다.


우리의 만사에 인연과 업의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대가 전생이나 윤회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든 매사는 철저히 전생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아이와 하나를 열 번 가르쳐주어도 모르는 아이의 관계를 단순히 부모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자리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온 것으로 보는 서양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재능과 특질, 혹은 개성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레뮤리아인이나 플레이아데스 성단이나, 시리우스에서 혹은 아틀란티스의 전생이 왜 없을 것인가?

우리가 우주의 한 세포임을 각성한다면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인들 존재치 못하였겠는가?

시간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 공존하는 우주의 바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최초로 호흡을 연재할 때, 최후까지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을 20명 정도로 추산하고 연재가 끝나면 최후까지 남은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일로 내 의무를 마치려한다. 얼마간의 정진이나 깨달음, 자각의 경중은 있을지라도 100회의 호흡연재를 정독하고 실행하였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변환한다.

-나는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호흡의 Bible을 썼다. -

물론 너무 급속한 발전을 원하여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호흡은 가장 짧은 순간에 변환을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메스로 우리 몸의 기관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기간 변환의 수행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우주와 자연의 섭리와 동일하다.

키를 찾아 헤맨 사람은 호흡이 키를 찾는 작업이 아니라 노를 저어 나가는 운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호흡의 감각들을 습관으로 바꾸어 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호흡의 습관은 에너지의 변환을 이끌어 내게 되는데 에너지의 변환은 궁극적으로 몸과 마음을 변환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이제까지 갈고 닦았던 머릿속의 나, 곧 에고의 벽에 부딪친다.

호흡을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적은 바로 이 에고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 벽을 뚫지 못한다. 자신의 변환을 두려워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내가 탄생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이제까지 가진 것을 다 잃는 느낌이 든다. 이 상태를 허용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 것인가?

이 상태를 허용한다면 우리는 천천히 혹은 급속히 깨어나게 하는 호흡의 에너지를 체험하게 된다.

내 호흡강의가 왜 호흡의 방법만을 기술하지 않고 끝없이 정신과 삶의 혹은 철학이나 근원의 문제들을 논하고 있는지,

그것은 뇌의 내려놓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내가 판단하기엔 오류를 범하게 하지는 않는 진실을 기술하며 마음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스위치를 찾는 행위를 좀 하다가 포기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생각해 보면 작심삼일이 아닌 것이 우리 삶에 몇 개나 있을 것인가?

오늘을 내일로, 내일을 모레로, 모레에는 다른 탈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속성을 우리가 극복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맹세코 나의 강의를 읽거나 실행하여서 잘못되는 일은 없다. 자신의 몸을 괴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나는 이 강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Online에서 만났다. 그들은 모두 다 높은 진동수를 꿈꾸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분들에게서 배운바가 무척 크다. 시대는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에너지를 요구한다.

당연히 이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에너지를 꿈꾸는 사람들은 만날 것이다. 그것이 어느 공간이든 간에,

그 만남은 너무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랑의 절대 명제는 수요자의 마인드가 아니다.

그것은 공급자의 마인드이다.

목자의 피리소리를 따라가는 양이 아니라 진정한 목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을 무조건적인 배품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자위를 위로하는 행위가 되기 쉽다.

사랑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그 대상이 자존을 회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대상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이나 무생물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내 가슴의 따뜻한 에너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갈구할 뿐, 나누어 줄 것이 없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거대한 흐름을 쫓아가야하며 그것에서 벗어난다면 성공이나 출세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 삶을 버리고 혹은 나를 버리고 세상의 시류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면 이것은 성공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복종하며 노예 같은 삶을 성공이라 믿는, 스스로 최면 걸린 상태일 것이다.

진정한 성공은

‘자유와 평화와 사랑의 에너지가 가슴에 현신하는 것이다.’

진정한 성공은 속물스런 마음의 조류에서 벗고 새소리, 바람소리 꽃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시냇물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렇게 변신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흐름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골짜기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툴레의 ‘새로운 만남’이라는 의미이다.

호흡은 이 새로운 만남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이며 에너지이다.

사랑하는 전생의 벗들이여!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에너지로, 빛나는 잣나무로 만나지 않겠는가?


나의 갈망은 늘 깊고 따뜻하다.


 

출처 : 자연 문화 동호회
글쓴이 : 인디고2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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